김명곤(1977)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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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큰타 -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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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1977)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축소판).pdf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택견, Taekkyeon)
"하나 둘 이크, 하나 둘 이크" 구령 소리가 매우 익살맞다. 구령에 맞추어 팔을 가슴 앞에서 휘휘 저어대고 한 발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가 뒤로 살짝 거두면서 허리를 가볍게 흔들거리는 몸짓은 영락없는 춤이다. 무서운 느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흥겹기까지 하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한참을 그렇게 굼실대더니 "서거라" 하는 구령이 떨어지자 발을 멈추고 몸을 낮추어 선다.
"거리제고"라는 구령이 떨어지자 서로 손을 내밀어 상대와의 거리를 재더니, "섰다"라는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이 발을 꼬아 발장심으로 상대의 아랫배 근처를 내지른다. 공격을 받은 쪽은 휘휘 젓던 손으로 발을 탁 쳐내고서 자기의 발로 공격한 쪽의 얼굴을 원을 그리며 후려 찬다. 그러나 그 공격도 상대가 슬쩍 몸을 비키는 통에 헛발질이 되고 말았다. 역습을 당한 쪽은 상대의 공격을 피한 다음 그 틈새를 노려 왼발로 상대의 된다리 안쪽을 차내어 낚시걸이를 걸어보지만, 이미 그런 공격에 익숙해 있는 상대는 발을 들어 오히려 상대에게 딴죽을 건다.
점점 거세어지고 날카로워지는 동작들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의 흥겹던 기분이 싹 가시고 온몸에 긴장이 감돈다. 춤사위 같기만 하던 손놀림—그것을 "활개짓"이라고 한다—이 먹이를 덮치는 맹수의 앞발처럼 매서웁고, 우스꽝스럽던 발의 움직임—그것을 "품밟기"라고 한다—이 위험을 눈치챈 학의 걸음처럼 신중하다.
"저 높이 차는 애가 최용규라고 두동 짜리고, 저 높은 쪽이 박만엽이라고 한동 짜린데, 동이란 게 태권도 식으로 말하면 단이란 말입니다. 헌데 저희들끼리 하도 여러 번 겨루다 보니 서로 수가 뻔해 놔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는군요." 연습복에 땀이 흥건히 배도록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서로 빈틈을 찾으려고 노려보며 빙빙 도는 두 제자를 가리키며 충주에 있는 "한국 정통 무술 태껸 도장"의 관장인 신승(신한승) 씨가 말했다.
올해 쉰두 살인 신승 씨는 가무잡잡한 살결에 부리부리한 눈과 네모진 얼굴을 가진, 생김새부터 영락없이 운동가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연신 제자들을 불러내어 둘씩 짝지어 겨루게 해놓고 저것은 무슨 기술, 저것은 무슨 차기 하며 태껸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열심히 얘기를 하는지 정작 시합을 하는 제자들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듯싶었다.
위대(웃대)와 아랫대의 격렬했던 결련태껸
태껸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여든이 넘은 노인네들 가운데에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렸을 때에 태껸하는 것을 보았다는 노인들은 여럿 있지만 직접 가르침을 받아 기술을 익힌 사람은 겨우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알려지기로는 서울 사직동에 사는 올해 여든다섯이 된 송덕기 노인과 반포 아파트에 사는 올해 여든여섯이 된 김홍식 노인과, 이들에게서 태껸을 전수받은 몇몇의 무술가와 함께 신승 씨가 있을 뿐이다.
송덕기 노인은 지금부터 칠십 년쯤 전인 그의 나이 열너덧 살쯤 되었을 적에 스물아홉 살 난 임호라는 사람에게서 사직동 뒷산 잔디밭에서 태껸을 배웠다고 한다. 그가 태껸을 배울 때만 해도 서울의 사직골, 유각골, 삼청동, 애오개와 같은 곳에 태껸꾼들이 많이 있어서 단오날이면 서로 이웃 마을 태껸꾼들과 수를 겨루었다고 한다. 고의적삼에 솜버선을 신고 뒷산 잔디밭이나 개천 모래밭 같은 빈터에서 연습도 하고 겨루기도 했으므로, 특별한 도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부터는 일본 순사들이 태껸꾼을 모조리 잡아가는 통에 태껸을 하다가도 순사가 오면 와르르 달아났다가 다시 모여서 배우곤 하느라고 스승한테서 제대로 조목조목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김홍식 노인은 세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스물 남짓한 젊은 시절에 태껸을 배웠다고 한다. 그때의 서울은 웃대와 아랫대가 엄격히 구별이 되어 있었고 문안과 문밖끼리도 구별이 엄했다고 하는데, 웃대는 인왕산 아래쪽 곧 대궐에 가까운 쪽을 일컫는 말이었고 아랫대는 청계천 건너쪽이며 문안은 서울을 둘러싼 성문의 안쪽이고 문밖은 그 바깥쪽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웃대는 주로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도가 대단해서 이것이 늘 불만인 아랫대 젊은이들이 가끔 웃대의 젊은이들에게 시비를 건네는 수가 있었다.
그러면 웃대에서는 태껸꾼들을 모아 아랫대 사람을 청하게 되어 서로 시합을 벌이는데, 보통으로 시합을 할 때에는 "서기택견"이라고 해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지만 동네 사이의 감정이 나쁠 때에는 "결련태껸"을 한다. 그것은 서로 겨루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도 살인죄로 치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 행하여지는 무서운 싸움이라고 한다. 결련태껸을 할 때에 쓰던 기술은 잘못 쓰면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으로 전해져서 여간해서는 그 법을 배울 수 없었다고 한다.
"잘하는 사람들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담장이고 뭐고 휙 날랐지. 두 발로 휙 떠서 가슴을 차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서 그 다음 사람을 찼으니까. 하지만 난 조금밖에 못 배웠어. 첫째로 부모님이 죽어라 말리시는 데다가,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라서... 게다가 일본놈들이 태껸한다 하면 모두 잡아다 죽였거든."
25가지 기본 기술과 '째', '동'의 체계화
신승 씨는 위의 두 노인에게 태껸을 배워 끊어지려던 태껸의 대를 이은 사람인데, 본디 레슬링과 유도를 한 그가 뒤늦게나마 태껸에 뜻을 둔 데에는 어릴 적의 주위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서울 왕십리에서 자랐는데 같은 동네에 살던 그의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으레 태껸꾼들이 몇 사람씩 묵고 있어서 그들이 연습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의 작은할아버지인 신재희 씨는 오백 석이 넘는 부자로 활쏘기나 씨름 같은 것도 좋아해서 이름난 씨름꾼이나 반건달 같은 패거리들이 늘 그의 집 사랑방에 묵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 태껸꾼들도 일고여덟 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이 씨, 김 씨라고 불리던 두 사람의 실력이 제일 나았다고 한다.
그러다 1970년 초봄 무렵, 신승 관장은 신문에 실린 송덕기 노인의 기사를 읽고 서울로 찾아가 만나게 되었다. 노인은 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봄·가을에 한두 달씩 아침마다 활터 뒷산에서 가르쳐 주게 되었다. 그렇게 삼 년쯤을 배운 뒤에 신승 씨는 충주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았으나, 옛 방식 그대로 가르치니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모두 떨어져 나갔다. 고심하던 터에 김홍식 노인을 만나 "처음에는 기본기를 모아서 가르치고 어려운 기술은 그 다음에 가르쳐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따라 태껸의 동작 가운데 기본이 될 만한 동작들을 뽑아 최종적으로 스물다섯 가지를 기본 기술로 삼았다. 우선 서는 자세를 원품, 좌품, 우품으로 나누고 품밟기와 활개짓을 익히게 한 뒤 여러 가지 발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발장심으로 상대의 무릎을 차는 깍음다리, 발등으로 상대의 발뒤꿈치를 잡아채는 낚시걸이, 걸치기, 명치치기, 발바닥으로 따귀를 때리는 발따귀, 발등걸이, 딴죽, 그 밖에도 얼렁발질, 돌개치기, 두발낭상 따위를 익히게 하고, 태껸에서 쓰는 유일한 손 기술로 엄지와 검지를 벌려 상대의 목을 쳐내는 '칼재비'도 익히게 하였다.
또한 급수와 단의 이름도 고유한 우리말로 만들어, 타 무술의 '급'을 **"째"**로 정하고 '단'을 **"동"**으로 정했다. 째는 첫째 둘째 할 때의 째에서 빌어왔고, 동은 윷놀이에서 말이 모두 빠져나와 "두동 났다"고 하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이름을 정하는 데에도 송 노인, 김 노인은 물론 한글학자인 한갑수 씨와도 깊이 상의하였다.
수박희(수벽치기)와 태껸의 사료적 혼선에 대하여
남아 있는 문헌에 그 이름이 저마다 다르게 적혀 있어 신 관장도 고심하고 있다. 『우리말 큰사전』에는 "태껸" 또는 "택견"이라 적혀 있고, 구한말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에는 **"탁견희(托肩戲)"**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송 노인 역시 "태껸"이나 "택견"이 아닌 "탁견"이 맞으며 탁견을 하는 사람을 "택견군"이라 불렀다고 증언한다.
기록을 찾아보면 태껸보다 '수박희(手搏戲)'가 더 자주 나오는데 정작 수박희는 그 기술이 끊기어 전혀 모습을 알 수 없다. 문화재위원인 예용해 씨는 수박희를 우리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 동대문 근처에서 수벽치기를 한다는 노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하다고 증언했다. 또한 『조선무사영웅전』을 쓴 안자산은 수박희와 택견을 같은 종류로 보았으나, 실제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수박희는 그 모양이 태껸과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중국 권법에 가깝다. 특히 태껸을 하는 송 노인이나 김 노인, 신승 씨 모두가 **"수벽치기나 수박희는 전혀 들은 일도 본 일도 없다"**고 일축하니 성급하게 태껸과 수박희를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원형 보존과 경기화라는 서글픈 숙제
태껸과 태권도는 누가 보아도 다른 성질을 가진 무술이다. 태권도에는 공격과 방어의 일정한 모양새를 갖춘 '형'이 있지만 태껸에는 형이 전혀 없으며, 대신 **"본때를 보인다"**고 할 때 쓰는 **'본'**이 있을 뿐이다. 또한 태권도의 동작은 직선에 두고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하지만, 태껸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동작의 기본을 '원(圓)'에 둔다. 중국 권법과도 달라 동작이 길게 흐르지 않고 순간의 탄력을 중요시하며, 중국 권법에서 자주 쓰이는 주먹 쓰기가 없다.
"참 힘에 겨운 노릇입니다. 원목은 원목대로 놔두어야 재간 있는 목수가 깎아서 쓰지, 재간도 없으면서 맨송스레 고치고 다듬으면 되레 해치는 법인 줄을 알면서도 경기화를 위해 이렇게 손을 대놓았으니 마음에 꺼림칙합니다. 이제 문화재 지정만 받으면 저는 뒷전으로 물러서렵니다." 한 달에 오백 원씩 건물 사용료도 되지 않는 회비를 받으며 뒤를 물려줄 기망한 제자가 없어 쓸쓸해하는 신 관장의 미래 얘기에서, 우리 전통문화 모두의 서글픈 자화상이 느껴진다.




